영천 호국원 Yeongcheon National Cemetery
시골에서의 다음날은 부모님이
계시는 영천 국립묘지, 호국원으로
향하는 길, 상전님은 처음 방문합니다.
영천으로 가는 길도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운전이
단축되었고 길도 잘 뚫려 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아버지는
21살의 나이로 나라을 위해 제주도로
파병되자 둘째 아들이 걱정된 할머니는 죽을
끓여 배를 타고 아들 찾아 갔습니다.
근면 성실 인내 라는 가훈으로
가족을 이끌어 오신 아버지는
군에 입대하여 일병으로 제주도에서
다시 육지로 왔고 전쟁은 끝났습니다.
이런 해프닝으로 할머니와 서로
어긋나고 다른 병사에게 죽을 주고
구사일생 귀가했다고 합니다.
전쟁통에 할머니도 아버지도
위험 천만의 여행길이지만
용케도 무사히 살아났습니다.
할머니의 이 이야기는 모하비 유년시절
옛날 이야기처럼 자주 들었습니다.
영천 호국원 주소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호국로 1720
1720 Hoguk-ro, Gogyeong-myeon,
Yogyeong-si, Gyeongsangbuk-do,
South Korea
영천 호국원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을 모시는 국립묘지이고
1997년 4월 착공 4년 만에 조성되어
2001년 1월에 개원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일병으로 전쟁이
끝났고 2007년 5월에 돌아가시어
고향과 가장 가까운 영천 호국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이 번호를 따라 아버지 묘비를
찾아 걸으면 여러 묘비들의
출생과 사망 날짜 만으로도
파란만장한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모하비가 8년 만에 찾아
막내딸로서 대표로 먼저 절을
올리고 참가자 일동이 절을 올립니다.
2017년에 사망하신 어머니는
그리워하던 아버지와 함께 묻히어
또다시 재회하니 어머니는 편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79세의 나이로
어머니는 86세의 나이로 함께 묻혔습니다.
묘비의 측면에는 아버지 슬하의
자식과 손주 외손주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이 국립묘지에서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참배하고 싶었으나
코로나로 일주일을 허공에 날리니
한국여행 일정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상전님은 18년 만이 고국 방문에
4일간의 한국 일정이 억울해 합니다.
인생은 계획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며 불운 뒤에 행운이 찾아 올
순서도 인생이라고 모하비는
격려했습니다.
영천 호국원 묘비도 넘치어
사진으로 보이는 건물에 납골당을
만들었습니다.
참배를 마치고 집으로 향합니다.
모하비가 블로그 개설이 2016년이었고
처음 참배한 이곳은 2014년 이어서
블로그 포스팅은 없지만
그 기억은 생생합니다.
그때는 아버지 혼자 묻혔습니다.
고인과의 만남과 작별은
참으로 빠르게 진행되어 아쉽습니다.
산자를 위한 일정으로 급히 떠나니
마음은 눈물로 찡해집니다.
돌아오는 길에 모하비의
모교인 계당 초등학교를 지납니다.
예쁘게 잘 단장된 모습이지만
지금은 학생수가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모하비 집은 금호강과 석천강 사이에
있는 어찌 보면 섬과 같아서
홍수가 심할 때는 작은 개천이 넘치고
큰 다리로 이용하기 위해 평소보다
2배의 거리를 걸어서 하교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이런 멋진
다리가 많이 건설되었습니다.
금호강 너머로 보이는
빌딩은 대구대학교이고
인구가 줄어 들면서 불황이 없던
대학교도 점점 쇠퇴되는 모습입니다.
경산에는 포도, 사과가 많이
생산되는 도시이고 맛도 좋습니다.
다리를 건너 둑길을 자동차로
달리도록 자동차 길이 정비되어 있고
승마장과 골프장도 있습니다.
작은 오빠가 운전하고
외갓집을 찾아 가 보기로 합니다.
코로나 여파로 외삼촌, 작은 외삼촌
내외도 돌아가시고 맏딸인 이모만
요양원에서 투병생활 중이라고 합니다.
대창천은 금호강의 발원지이고
이 금호강으로 논농사, 밭농사가 잘 되어
곡류 생산과 과일밭이 많은 고장입니다.
이 일대를 금호 평야라 부릅니다.
모하비는 외할머니와 생일날이 같아
학교 가기 전에는 잔칫날
외갓집을 늘 방문했습니다.
외할머니는 엄하시기로 동네에서
소문났지만 모하비는 세상 최고가 되는
순간이 바로 외할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유년시절 강물을 조절한
일제시절에 만들어진 금호강이고
우리는 이곳을 '보살'이라 불렀는데
남자아이들은 고기 잡고 멱감은 추억의 장소입니다.
인명사고가 있는 무서운 강이기도 합니다.
밤에는 여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달밤 멱감으러 가니 모하비도
언니 따라 가기도 했습니다.
모하비는 한국 가면
고추장, 된장, 미숫가루, 매실액들을
잘 포장하여 미국으로 가져옵니다.
보석님이 한국에서 온 것들은 모두로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의 검역은 이 내용물에 대하여
잘 아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쉽게
검색대를 통과합니다.
이 내용물이 반대로 미국에서 나갈 때면
미국인 검색대에서는 이 이상한 형체에 대하여
일일이 확인합니다.
누군가 내 가방을 연다는 것은 기분이
좋지는 않습니다.
동대구역을 4번이나 오가면서
조카가 짐을 기차 안까지 일일이
올려다 주었습니다.
이 여행용 가방 절반은 서울 오빠 집에
가져가는 채소와 먹거리로 언니가
챙겨준 것입니다.
큰 지퍼백에 얼린 사골은 정말 무겁습니다.
무거운 가방도 사랑 앞에서는
옮겨지는 법이고 모하비는 부모님
형제로부터 배웠습니다.
조카와 보석님 상전님도 이것을
보며 자랐습니다.
이것이 한국적인의 사랑 바로 정입니다.
* 모하비의 모험에 오신 이웃님, 고맙습니다.
** 머무는 잠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Life in USA 미국 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4편. 신라의 숨결 경주, 한국여행 (5) | 2022.10.07 |
---|---|
3편. 추석날 호텔행 한국여행 (7) | 2022.10.05 |
1편. 코로나 걸린 한국 여행 (7) | 2022.09.30 |
산타 바바라 (2) | 2022.07.23 |
2. 달라스 여행 - 3, 4 일째 (0) | 2022.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