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하비의 미국 이야기 2 ( 동 기)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가족과
이별 없이 함께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 중에 하나 일 것이다.
그래서 한 가족이 멀리 이주하여 터를 잡게 되면 다른 형제와
친구들을 부르고 같은 지역에서 군락을 지어 살게 된다.
그러나 현 시대에는 한 식구도 서로 얼굴조차 보고 살기 어렵다.
한국 사회가 그런지? 한국 교육이 그런지? 아니면 내 가정만 그런지?
가사 일은 점점 줄어 들지만 사 교육비로 가정 경제는 점점틈이 생기고 어쩔 수 없이
맞벌이가 필요 불가한 현실이 되어 버렸고, 각자의 일들로바쁜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을 잊고 살 때가 많다. 요즈음은 기러기 가족도 과거와
달리 세 가지로 분류 한다고 한다.
첫째는 1-2년 만에 만나는 해외 기러기 가족이 있고,
둘째는 일주일에 만나는 지방 기러기 가족이 있고,
셋째는 과중한 업무와 한국의 술 문화로 한 집안에 살면서도
아침에 얼굴 잠깐 보는 집안 기러기 가족이 있다고한다. 과연 나는 어디에
소속된 기러기일까? 만약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면
나름대로 행복한 삶이 아닐까!
우리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쌍둥이가 동시에 아침에 나가면 밤 11시에 귀가하고,
나 역시 정신없이 일하다가 저녁도 못 먹은 체, 밤 9시에 들어와도 빈 집이다.
막연히 새로운 세계로부터의 도전은 하고 싶었으나 기회가없었거니와 가족의 이별이
두려워 생각에 그칠 뿐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꿈은 꾸면 이루어지는 것인가!
외국에 몇 분을 알고 있지만 농담으로도 외국와서 함께 살아자는 제의는
한 번도 받아 본적 없었고, 그 만큼 외국 생활이 힘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아는 미국에 사는 박 선생님은
한국의 교육 실정과 생 이별아닌 가족관계
이런저런 한국의 이야기로 미국 이민 제의를 했고 나는 못한다고 손을 내저었다.
내 나이 40중반이라 무엇을 도전하기엔 이미 늦은 나이라 생각했다.
20대의 꿈을 이루기 위한 것도 아니요, 30대가 아니라 아이교육을
위한 것도 늦은 나이이고, 지금은 시기적으로도
이민 자체가 힘들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늦었다고 생각한 때가 가장 빠른 시점이라는지극히 교과서적인 이론과
긍정적인 사고만 펼친다. 세상일이 어찌 긍정적인 사고만으로 되었던가!!
그는 분명히 나 같은 사고라면 할 수 있다는 용기 한마디로나는 결국 아이들 체험삼아
겨울 방학 때 미국 여행을 보내기로 하고 아이들 여행 후 유학하고 싶다면 2006년 3월쯤
추진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생각이 이쯤이 되자 알뜰한(^^)
내 머리가 또 회전하기 시작했다.
겨울방학 해외여행보다 기말고사 시험 후 방학직전에
여행시에 항공권이 많이 싸다는 생각을 했고,
수능보는 날은 아이들이 쉬는 것을 착안하여
마침 그날 나도쉬니까 비자를 받기로 했다.
인터뷰 예약을 하려고 했다.
그날 따라 그 시간만 인터뷰 일정이 비어 있어
미 대사관 접속 후 어렵게 예약을 할 수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그러는 사이에 미국의 박 선생님은 현재 그지역에 1년 정도
유학중인 가족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미국 온 것을후회하지 않는다는
그 학생의 말에 이야기는 여행에서 급반전하여 유학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나같은 과정을 밟은 유일한 가족이 1년 전에 있었음을 알았고, 그분의 친한 친구 중에
유능한 변호사가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나도 우리 아이들이 미국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까지 최소한 3년간은 아이들과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좋다고 했다.
아이들의 여행 이야기가 10월에 나왔고, 유학 이야기가 11월 초순이었다.
미국의 학교 방학이 주마다 달라서 그 학교는 1월 3일이 개학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조기 유학으로는 늦은 나이라 한 학기라도 앞당기야 한다며,
크리스마스와 연말 연휴를 감안하여 서류 절차상 12월초에입국을 해야
좋겠다는 생각이 되자 시간이 급한 상황임을 11중순인 11월14일쯤 알았다.
나는 도미하려고 마음 먹었으니 무리지만 미국의 일정에 따라 추진하기로 결심하였다.
10월 중순에 지방에서 동창모임과 직장의 연수 일정에도 나는 내 인생의 대 반전이
있으리라고 전혀 느끼지 못 했다. 그저 이런 일이 순식간에진행되고 있음을 11월에 느꼈다
1차 두려운 발표는 가족 이었다--지금도 가장 미안한 부분은가족이다.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그랬다며 서운하다지만 나 역시 갑자기였다.
아마 나도 이런 꿈을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다면 심사숙고 하고 또 고민하다가
흐지부지되어 지금쯤 한국에 눌러 편히 잘 살고 있을 수도있었겠다 싶다.
가장 중요하고 미세한 부분은 아이들이었다. 나는 비자가 있는 상태이고 아이들은
부모 동반이 필요없이 직접 인터뷰해야 하는 나이이고 미 대사관 내에는 아이 둘만 들어가
모든 인터뷰를 마쳐야 한다. 그래서 주의 점을 충분히 숙지해 주었고 전날 저녁에 리허설까지 했다.
물론 아이의 인터뷰 상 혼란이 올까봐 유학 이야기는 할 수없었다.
시기가 방학직전 인지라 인터뷰는 긴 줄로 장사진을 이루어져 있었고, 시간제 예약은
이미 무시되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미국 여행에 들떠 추위 속에서 줄서기도 마냥 즐거워했다.
아이들이 인터뷰에 들어가고 한참 만에야 나왔는데 손에 여권이 없는 것을 보고
나는 안심했다(이것은 비자를 주기 위해 여권을 미 대사관에서 수거했다는 의미이다.)
---중학 2때 일년간 미국 교환 학생을 원하면 해 주겠다고했는데
본인들이 싫어해서 그만 둔 적이 있었는데 가끔은 그랬다.
"등 떠밀어서라도 그때 보내주지" 하면서 고등1 때서야 후회의 말을 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일식 집에서 여행이 아니라, 유학을 말했다.
도미라는 엄마의 말에 얼마나 혼란이 왔을까? 그 자리에서수긍은 쉽게 했지만,
자신의 인생을 다급하게 얘기 한다고 아우성이다. 지금부터친구와 학교와 이별 및
자신과의 다짐을 하라고 했다. 그러나 내 딸들의 장래에 대한 일이므로 24시간
스스로 고민해 보고 단 한 치라도 아니다 싶으면 엄마는 기꺼이 추진한 모든 일을
중단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참고로 아빠는 엄마 지지자이다)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남편에겐 전화로 얘기하고 그 통화에서 긍정의 대답을 받았다.
내 생각과 판단을 믿어주어 고마웠다. 대구 사는 언니에게부모님께 언지 하라고 했더니
머리 아프다며 조카를 바꾸어 주었고, 조카 역시 직업이 교수이고, 철난 노처녀인지라
자신의 외조부모인, 내 노후하신 부모님 염려에는 안중에도없고 "이모의 자식만 생각하는
이기적 결정은 미국의 개인적인 사고가 한국의 가족애를 무시 한다"는
그녀의 지극히 한국적이고 논리적인 말에 나는 그만 난간에걸리고 말았다.
주말인 12월 3일 대구의 부모님을 찾아 뵈었다. 친정 어머니는 겨울의 추위를 먹고
자란 시금치를 다듬어도 이 하찮은 것조차 못 먹겠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는
말씀을 전해 듣고 내 아이를 위한다는 이유로 부모님께 불효를 드릴까
걱정되었고, 나의 자세한 설명으로 드디어 친정 어머니의 허락을 받았다.
나의 아버지는 내 인생의 어떤 결정에 반대하신 적이 없었다.
그때마다 어머니와 심하게 다투셨고 그런 모습에 나는 내 결정을 꺾으려 하면,
어느새 아버지는 내 등 뒤에서 응원해 주신 분이다. 모처럼어머니의 침대에서
깊게 단잠을 자고 일어나니 내가 자란 추억의 친정집은 첫눈으로 하얗게 덥혀 있었다.
정원이며 장독대며 텃밭이며 엄마의 일상을 열심히 찍었다. 김장하시면서 서울로
택배로 못 보낼 모성에 금이 갈까 두려웠다. 대구의 몇몇 친구와 작별하고 또 미쳐
연락이 안 되어 통화조차 못한 채 아쉬움을 뒤로하고 일요일밤늦게 눈길을 달려 상경했다.
사회 활동에서 개인의 일로 인한 무책임을 가장 싫어한 내가 일주일 내로 인수인계해야
한다는 의논 아닌 통보로 회사 지사장님도 한대 맞은 기분이란다. 나의 한 가지 일에 대한
긍정적 사고를 알았지만 지금은 개인의 일로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사장님은
간파 하신 것 같다. 일주일은 무리고 3일간 일정 짜고, 그 후14일 동안 인수인계일로 잡고
나도 양보해야 한다면서 결국 12월 5일까지 인수인계를 마무리 하기로 하였다.
12월 9일 저녁6시 비행 날짜를 잡고 보니 모든 일정이 긴박하여 졌다.
11월 말에서 12월 초의 매일을 나는 새벽엔 모닝콜, 오전엔구비서류, 오후엔 새 선생님과
인수인계수업, 밤엔 작별모임에 그리고 새벽까지 짐 정리를했다. 예약된 아쉬움의 만남.
그 사이 사이 끼어들기 만남 속에서 도미하여 실패한 수만가지 사례들로 나를 혼란에 빠트렸다.
식구들, 친구, 선배, 지인들의 반대와 12월 7일 밤에 급기야올케의 동조를 큰 오빠가 알았고
아파트 정리가 늦어져 원활하지 못한 금전적 대처를 올케가하기로 하였기에 오빠부부의
냉전이 생겼고, 설상가상으로 비행기 예약한 대한 항공사의 파업 선언이 뉴스에 보도 되었다.
내 인생의 개혁. 아니 도전 앞에 찬물로 뒤 엉키는 일이 예고되었고
아메리칸 드림의 시련은 나를 끝까지 힘들게 따라 다녔다..
고민은 결정 전에 수 없이 하고, 그 결정 후엔 역경조차 최선을 다하는 사람 아닌가?!
순탄하지 않았던 미국 행을 다음 편에서 기대하시길 바라며...
고국의 나를 아끼는 모든 이를 생각하며....
모하비의 다음 이야기 3(과정)
*** 모하비 블방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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