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하비의 미국 이야기 3 ( 과 정 )
공교롭게 나의 도미 이틀 전에 대한 항공사의 파업이 선언되었다.
내가 떠나는 2005년 12월 9일은 파업이 시작되어 샌프란시코는 전면 결항 되었다.
대한 항공사 오픈 이후 샌프란시스코 결항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날짜가 연기 되길 바랬는데...12월9일 저녁 6시 비행 예정이하루 앞당져진
9일 날 아침8시에 타이빼이 공항으로 회항 다시 타이 항공기로 LA 공항에 착륙 한다고
전날 밤인 8일날 밤 9시에야 여행사로부터 통보를 받았다.
갑작스런 비행 변경으로 9일 낮, 오전 스케줄이 엉망이되어 버렸다.
미처 구입 못한 참고서는 단골 서점에 전화해서 늦게 퇴근하기를 요청했다.
간단한 약도 구입하고 출근길에 한 번 더 얼굴 보려던 오빠도 밤에 만났고,
밤새도록 아이 짐 챙기고 새벽 2시에 겨우 잠을 청했다. 고맙게도 남편은
새벽 5시에 먼저 일어나 손수 밥을 챙겨 준다고 부산을떨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가족애를 느끼기에 충분했고, 나는 남편이 안쓰러웠다.
공항 검색 도중에 미국에서 전화 울리고... 대구 어머님은 아이들 보겠다고 오전 기차로
상경할 계획이 무산되어 더욱 서운함을 드렸고... 모든 친구, 지인들은 변경된 일정을
알리고자 새벽 잠을 깨울 수 없어 문자 메세지로 인사하고... 각별한
제자에겐 선물도 나누었다. 선생님의 갑작스런 도미로
새벽에 일어나 전화 못 받자 수 통의 문자에 내가 보낸 답장이 너무 오타가 많아
지금도 지우지 않고 본다는 녀석이 있다. 마치 내가 어디로쫒기는 공공칠 작전
같아서 내 자신에게 화가 나고... 남편을 뒤로 한 체.... 타이빼이행 기내로 올랐다.
2시간 반 동안의 비행은 나의 긴장과 이별의 아쉬움이 다소 정리 되었다.
타이공항 로비에서 4시간의 기다림이 우리 셋의 긴장은 피곤으로 몰기에 충분했고,
타이 항공기로 밤새도록 비행을 했다. 나는 몰려오는 피곤으로 좁은 기내에서 장시간 같은 자세로
잠에 떨어졌고, 기내의 운동 부족이 내 다리까지 부어 버렸다. 깜깜한 밤의 긴 터널에서 마침내
화창한 미국의 창공이 보였고 이내 박 선생님을 만났다. 아이들의 긴장해소를 위해 미 서부 일대를
여행할 계획으로 지인을 통한 미국에 있는 여행사와 연계시킨 것도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 분과의 여행 취소로, 일정 변경 의논으로 LA공항에서 2시간을 소비한 후(샌프란시스코에서
여행하며 내려오는 일정인데 LA공항에 착륙했다) 다시 버스로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버스로 달려
밤 11시 넘어 도착했다. 결국 우리는 파업으로 차와 비행기를 하루 더 타는 기막힌 행운(?)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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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미 서부 여행은 5일 동안 내내 아주 행복해 했었다.
==샌프란의 바다, 태평양, 금문교, 세계의 대부호들이 사는 세븐틴 마일, 사슴이
거니는 골프장, 파란 하늘, 정글 같은 해변 길, 금을 캤다는은광촌, 화려한 밤의 축제 도시인
라스 베거스, 끝없이 펼쳐지는 모하비 사막, 인디언과의 결투 66번 도로를 낀 거대한 산들, 콜로라도의 강,
광대한 그랜드 캐년, 그리고 할리우드의 모든 스타가 탄생한 유니버셜 스튜디오====
아이들의 빠른 적응을 위해 미국 서부를 여행을 먼저 하는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LA에 1년 체류 중인 집에서 3-4일 정도 머물다가 미리 계약해 둔 아파트로 이사를
하기로 했다. 함께 여행한 분들과 아쉬운 작별 후, 홈스테이 할 정옥씨를 만났다.
메일과 전화로 절친해 졌으나 내 소심한 첫 대면의 긴장과그 날 따라 밤 기온의
쌀쌀함과 건조함으로 나는 편도가 부어 중이염까지 걸려 힘든 날씨 적응을 해야했다.
혜림이는 열과 기침으로 정옥 씨는 가정 비상약과 박 선생님은 출근길에도
전화로 아이의 안부를 물어 주신 배려로 바로 나았지만, 나는 건조한 날씨에
다시 피부 알러지가 생겨서 온몸이 가려웠다. 한 겨울에 비해 따뜻하여 난방이 필요 없지만
추위를 타는 나에겐 밤이 되면 으실으실 추워져 향수병(아니 후회병)이 나기 딱 좋은 날씨였다.
또한 여행 후 또다시 정신없는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날 운전면허 필기 시험을 보고 실기 시험 일정을 예약받고
이틑 날은 자동차를 구입하러 갔다. 셋째 날은 가구를 이미선정해 둔 터라
내가 고르기 보다는 결재하러 갔다고 해야 옳은 답이다. 그리고 컴퓨터 두 대도 구입 했다.
4일후 렌트할 아파트에 갔더니 20일 날 오라기에 그때 이사하려나 하고 여러 가전제품을
사러 다녔다-- 예상보다 2주를 더 그 집에서 머물게 되었고세 식구가 여섯 식구로
늘어났고 식사 때는 가끔 박 선생님까지.., 7명의 조촐한 파티(연말)는 연일 이어졌다.
20일 날 만나러 간 아파트 매니저는 크리스마스 연휴라 28일 쯤이 좋겠단다. 모든 구입처에 배달
약속을 무기한 연기하게 되었고... 그는 이제 년말 연휴라 새해를 보내고 1월 3일 오라고 했다.
화도 나고, 기가 막혀서 다른 아파트를 보려고 했더니 여러절차(크레딧 조사)에 기간이
2주 이상 소요 되므로 그냥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갑자기 정옥 씨의 남편이 새해
휴가를 내어 오신다는 전화로 그들은 기뻣고, 우리는 암담했고, 희비의 극치였다.
헤어진 지 처음으로 고국에서 오시는 아빠 맞이에 나는 더이상 그 댁에서 머물 수 없었다.
박선생님과 정옥씨는 우리 셋을 위한 회의를 한 후 박 선생님 댁으로 가자고 했지만
더 이상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나는 살 집의 근처 콘도급 모텔로 거처를 옮겼다.
3일 날 매니저는 또 카펫트가 비불연성이 와서 바꾸어 공사해야 한다고 지연 됐다고 했다.
1월1일부터 결국은 5일동안 모텔 살이를 하고 6일날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 일로 나는
내 아파트 매니저를 불신하여 지금도 불편한 표정을 짓지만, 그는 나를 웃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순수 브라질맨이다. 정옥씨는 서울서 오신 남편 골프장 안내하랴, 콘도식 모텔이라
밥은 내 전기밥솥으로 해 먹었으나 조리기구가 전자렌지 뿐이여서 반찬을 배달하랴,
나도 이래저래 미안 하였고, 그 매니저는 아예 날을 정하지모호한 미소로 항상 내일이고...
그래서 모텔도 하루씩만 예약해야 했다. 그 이유로 매일 짐을 모텔로 풀고 다시 차에 싣고
다니느라 고충이 말이 아니었다. 모텔 생활기도 만만찮았다. 12시엔 반드시 체크아웃이라서
2일 날 12시이후는 월마트에서 생활품을 구입했다. 차는 이미 짐차가 되었고 밤에 체크인하고
3일 날 모텔에서 첫 학교를 갔다. 학교에도 걸림돌은 또 있었다=== 너무 많은 전학업무로
서류 작성하여 내일 제출하라기에 다시 오후에 모텔에서 학교 서류를 작성했다.
4일. 첫 사무실 통과== 두 번째 사무실서 예방접종 누락 건으로 병원에 가서 정상 소견서
받아 와야 입학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필 결핵반응 테스트라 주사 후 반응 24시간
후에 결과를 안다니 결국 정상이라는 글자 하나 달랑 받으려고 쓸 필요가 없는 16만원의
엄청난 진료비와 24시간의 시간을 소비한 후 6일 날 "존 에프 프란시스 팔리 하이스쿨" 에
입학이 허가 되었다. 그러나 담당 카운셀러 교사 부재로 또다음날인 7일 날
아침 8시에 가서 여기저기 사무실 거쳐 2시간 상담 후 겨우
아이들을 둘째 수업에 들어가는 걸로 입학이 끝났다.
우여곡절 끝에 엄청난 모텔비를 지불한 대가로 새 카펫, 새싱크대 그 아파트에서
가장 좋은 위치의 집을 얻었고, 첫날(6일)은 침대 없이 맥시칸들이
신발신고 작업한 카펫에서 셋이 추워서 이불 포개고 잤다.
그래도 내 집에서 학교 갔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다음날 가구가 일제히 들어 왔고, 컴퓨터는 전화
개통 후5일 후에 개통할 수 있다고 한다.
이제 전기, 전화, 개스, 캐이블 신청이 또 보통 복잡한 것이아니었다.(나중 언급 예정)
아파트 입구는 차단되어 있고 작업하는 맥시칸이 너무 늦게와서 1월 20일 전화 개통은
무산 되었다. 다시 스케줄이 2월1일로 나왔다. 미국은 원칙과
기다리기(인내심)를 잘하면 천국이요, 안 그러면 지옥이라니
나도 천국을 택하기 위해 인내하고 결국 인터넷도
전화도 없이 1월 한 달을 통신에서 해방되는 행운을 얻었지만,
이로 인한 시련은 엄청났다.
미국 공중전화로는 서울은 통화가 되는데 지방인
대구는 연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과의
시차 때문에 내가 공중전화 하러 밤에 나가면 아이들이
밤외출 금지를 내려 나갈 수가 없었다.
친정 어머니와 연락두절이 되자, 한국의 가족들은
눈덩이 같은 악성 루머에 대구 어머니의 병환은 심각해 졌다.
어머니와 가끔 통화가 되면 무조건귀국 하라는 말씀뿐 이시다.
나는 어머니 걱정으로 이곳의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귀국 시 미국을 정리할 시간,
아이들 학교 상황,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는 부분을 자세히설명해 드렸다.
그러나 귀국할 절차를 알아보겠다고 말씀 드렸고
점점 평정을 회복 하셨다.그러나이것도 잠시 뿐, 설날 친지들이 인사 와서
각종 부정설, 염문설, 다시는 막내딸을 못 만날 것이라는
위로(?)까지---어머니는 정신적 혼란과
그날의 허락을 몹시 후회하시며 매일 우시면서 언니 오빠네로 전화 하셨고,
연로하시기에 형제들은 긴장하여 결론은 나를 데려오기
대책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전화가 개통 되었고,
나는 이틀 간격 시간대를 나누어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몸도 마음도
나약해지신 어머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며,
미국의 자세한 하루의 일정과, 이웃의 사심도
대가도 없는 친절, 내 안전을 위해 대변해 줄 변호사, 그리고아이들까지 동원했다.
지금은 이곳의 물가며 날씨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어머니의 마음이 여유로워져서 다행이다.
어느 나라든 이민이란 결코 쉬운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도대 혼란을 짐작 했지만
이런 우여곡절이 생기고 보니 내 자신이 홀로 선 느낌에 가끔은 캄캄한 칠흑의 밤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벽 앞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고 이절벽 앞에서 내가 내딛는
한 발짝의 선택은 오직 나 혼자 선택해야 한다는 점에서 하루 하루가 초긴장의
연속이었고 한국의 가족과 친지들의 불안이 나의 생활을 더욱 불안하게 하여
아침마다 일어나면 한국과 미국의 장소 변경에 혼란이 와서 체중이 감소 되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자연과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 나의 체중 회복을 신속히 도와 주었다
다행히 아이들의 첫 적응은 순조로워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나아가 한국의
가족들에게 안심을 주게 되었다. 이제 기회의 땅, 공평의 나라, 미 대륙에서
올바른 교육을 발판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나의 크나큰 숙제다.
나의 무기는 성실과 인내와 정직으로 미국의 코드에 접근하는 전략뿐이다.
근 3개월만에 평정을 찾고 보니 걱정해 주신 여러분의 따스한 마음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어 감사를 드리는 마음이다.
나를 걱정해 주시는 고국의 인정을 그리워하며....
모하비의 다음 이야기 4 (교육)
*** 모하비 블방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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